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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칼럼, 단편

[단편] 빅마우스 (2006년에 썼던 단편)

by 김곧글 Kim Godgul 2022. 4. 12. 20:54

 

 


 

(2006년 즈음에 썼던 단편이다. 지금은 사라진 포털사이트 '드림위즈(Dreamwiz.com)' 사이트의 어떤 코너에 올려진 적도 있다. 원고료를 받은 것은 아니고 소정의 상품(고급 스프링 노트)를 받은 것이 기억난다.)

 

(2022년 4월에 아주 약간만 수정함. 문체는 그 당시 그대로이다. 다소 만연체이고 늘어지는 감이 있어서 맘에 안들지만 그낭 그대로 놔두는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소 암울한 가까운 미래 배경 SF 단편이다)

 


제목: 빅마우스(Big Mouse) (원제: 미래생활백서 - 빅 마우스)

 


오늘은 아내의 56회 생일이다. 모처럼 자식 내외와 손주들이 거실에 모여 북적대는 바람에 사람 사는 느낌이 들어 기쁘기는 한데, 벌써 두 번씩이나 아래층의 40대 독신녀가 올라와, 한 번만 더 쿵쾅쿵쾅거리면 경찰서에 신고할 테니까 알아서 해요, 라고 윽박지른다. 도수 높아 뵈는 복고풍 뿔테안경을 잔뜩 찌푸린 콧등에 살짝 미끄러트리면서.

 

여느 때 같으면, 생일잔치가 다 그렇지, 라고 치부하련만, 뜻밖의 사건이 터진다. 내가 아내에게 올해는 무슨 선물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자식 내외의 정성이 담긴 조촐한 선물을 아내가 개봉한 이후,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그리 오래가지 않은 것은 확실히 기억난다. 물론 내가 아내한테 선물을 안 했다거나 합당치 않는 선물을 했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부부 사이에 생일선물 같은 걸 까딱 소홀히 했다간, 중대과실로 이혼사유가 된다고 가정법이 바뀐 것쯤은 나도 숙지하고 있다. 원인은 내가 아니라, 물론 누군가의 선물 때문도 아닌, 열일곱 살 먹은 장손녀가 어른들 모두 들으라고 한 말, 일종의 통보 때문이다.

 

“나 FR사관학교에 지원했어요.”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요즘 연예인 중에서 최고로 잘 나간다는 미모의 ‘과즙우유’와는 감히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이쁘고 사랑스러운 내 유전자를 물려받은 친손녀가, FR사관학교에 간다니, 지 애미 애비는 애써 놀라움을 감추고 설득작전을 공모하는 듯. 나는 무슨 말을 해 줘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자식내외의 눈초리가 변하더니 나를 원망하는 눈빛으로 가득 차버린다. 손녀가 이런 말까지 했기 때문이다.

 

“저도 할아버지처럼 훌륭한 군인이 될 거에요. 물론 평생은 아니지만요.”

 

오늘부로 나는 며느리한테 완전히 찍혔다. 이미 얼마 전에 손녀가 나를 찾아와 자신의 진로에 대해 귀띔했다는 사실까지 안다면... 더 이상의 상상은 더욱 외롭게 늙어가는 황혼만 확정 지을 뿐이다. 다만 나는 손녀가 FR사관학교에 들어가려는 것을 말리려고 무던히도 애썼다는 사실이 며느리에게 알려지기만을 바랄 뿐이건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때 손녀와 나 단둘 밖에 없었으니까. 손녀가 지 엄마한테 말한다고 한들 며느리는 나를 위해서 거짓말을 꾸며댄다고 생각할 게 뻔하니까.

 

며칠 후, 전에는 손녀가 내게 연락해서 만난 거지만, 이번에는 내가 손녀에게 먼저 연락해서 만나는 거다. 아내의 생일 다음 날, 며느리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기 때문이다. 어쩌면 며느리가 내게 직접 전화한 건 그때가 처음일지도 모른다.

 

“저하고는 얘기도 하지 않으려 해요. 아버님과는 통하니까 한번 만나서...”

 

여자 점원이 커다란 빈자떡 조각 하나를 즉석해서 포장해준다.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손녀는 배가 불러서, 먹다 남은 것을 포장해달라고 주문해서다. 후식으로 나는 카푸치노를, 손녀는 생과일쥬스를, 주문하고 나서 손녀는 내게 말했다.

 

“맛이 어때?”
“처음 먹어봤는데... 괜찮던데.” 나는 말했다.
“별로 먹지도 않구선...”
“......”
“싫어하나봐 이거?”
“......”
“할아버지, 빈자떡 싫아하냐구?”
“응? ... 싫지 않아. 그냥... 순수한 전통 빈대떡을 더 좋아하는 거지.”
“그랬구나. 진작 알았으면...”
“그런 대로 먹을 만했어.”
“할아버진 의외네?”
“뭐가?”
“보통 노인들은 거의 다 전통피자나 빈자떡을 좋아하는데, 할아버진 아니잖아.”
“......”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전통 빈대떡을 더 좋아하는 이유를 말하고 나서 화제를 며느리가 부탁한 것으로 돌린다면, 어떤 말로 시작하는 게 좋을까? 며느리의 부탁도 이해는 가지만, 솔직한 내 심정으로 손녀가 FR사관학교에 가는 걸 그다지 반대하지 않는데... 다만 바램이 있다면, 나 때와는 달리 손녀가 재학 중에는 실제 전투상황이 발발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런 확신만 선다면, “뭐든지 자기 하기 나름이야.”라는 멘트로 시작해서 손녀의 진로 선택이 인생에 꽤 유익한 경험이 될 거라고, 솔직히 말해주고 싶다. 식탁과 의자가 불편하게 고정 되서 불편한데도 아이들과 여자들은 그런 것 따윈 생각해본 적 없다는 듯이 이곳은 늘 시끌벅적하다. (주: 빈자떡은 당시에 빈대떡과 피자를 절묘하게 섞어 프렌차이즈화 한 아시아에서 특히 도쿄에서 인기 있는 먹거리다)


그로부터 두 달 후, 늦을지도 모른다며 총알모노레일을 타고 가자는 아내의 고집을 꺾고, 이제껏 가보지 못한 서울지역을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광경을 놓칠세라, 공중셔틀버스를 타고 간다. 어떤 대중교통보다도 느리지만 어떤 대중교통보다도 흥미롭다. 옆자리에 앉은 아내는 못 다한 화장을 좀 더 마무리하더니 선잠에 빠졌다. 이 구역은? 언젠가 지나가보기야 했겠지만 이번처럼 공중에서 직접 내려다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에 오래 살았고 도심관광을 좋아한다고 해도 구석구석 모든 곳을 돌아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는 몇몇 특수한 직업에 종사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좀 전에는 아랍어 간판이 즐비하더니 이제는 한문이 섞인 태국어가 즐비하다. 간혹 신축건물조차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봐요. 늦었잖아요.” 나는 아내의 핀잔을 들으며 총총걸음으로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인 곳으로 간다. 벌써 시작했나보다. 자연음을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던 흔적이 뵈는 웅장한 강당 내의 중앙좌석에는 짙은 푸른색의 근엄해 보이기까지 한 전통제복을 입은 젊은이들이 차지하고, 그 뒤편과 양쪽 2층에는 학부모들 같은 일반인들로 빼곡하다. 6주간의 기본훈련을 마친 남녀 신입생들은 기가 바싹 들어서, 혹시 나무 막대기를 끼워 넣은 건 아닐까 할 정도로 어깨가 딱딱하다. 무대 중앙 상단에는 입체적인 글씨체의 색상이 천천히 변한다. <제82회 FR사관학교 입학식>

 

인파 속에서 겨우 아들 내외를 찾아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며느리는 내 아내에게 활짝 웃으며 인사하지만 나한테는 시선을 피하고 약간은 어색한 미소를 머금는다. 자신의 딸이 이런 곳에 입학한 건 전적으로 내 탓이라고 아직까지 원망할 테지.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해 손녀를 설득해보려고 노력했건만... 손녀와는 달리 아직까지도 며느리와는 꽤 어려운 기운이 감돈다. 어쩌면 선입관인지도 모르고 내가 만들어낸 허상일 수도 있겠지만...

 

어느덧 입학식은 진행되고, 아니나 다를까 내가 입학했던 몇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지루하고 따분하다. 물론 연단에서 의미 있는 연설을 하는 남녀 장교들이나 초롱초롱한 눈빛의 신입생들이야 집중되겠지만, 나처럼 일반인들의 눈과 귀는 볼만한 프로그램을 고르려고 리모콘으로 계속해서 텔레비전 채널을 바꿔갈 때처럼 멍해짐에 빠져들 뿐이다. 때마침 다행히도 식후 2학년 선배들의 축하공연이 시작돼 몰려드는 잠이 떨쳐진다. 화려하고 정열적이면서도 절도 있는 몸동작의 의장대가 마스게임을 선보이자, 관객석에선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지고 강당 벽면이 들썩인다. 어쩌면 서로의 잠을 깨워주고자 무의식적으로 더욱 힘차게 손바닥을 부딪쳤는지도 모른다. 마침 잠에서 깨어나 고개를 삐죽 들어 호기심으로 가만히 지켜보던 아내가 내게 묻는다.

 

“무슨 의장대가 총도 없네?”
“왜 없어. 저깃잖아.” 나는 주변사람의 관람에 피해가 가지 않게 살짝 가리켰다.
“애~ 저게 뭐 총이야?”
“빅마우스(big mouse)라고 하는 거야.”

 

고급스런 가죽장갑, 의장대원 각자는 그것을 마치 중요한 물건 다루듯 군대식 단체춤을 펼쳐 보인다. 이곳 FR사관학교에서는 소총 대신 저걸 사용한다고, 내가 재학 중에도 한 번도 진짜 총으로 사격을 해본 적은 없다고, 저래 뵈도 빅마우스는 보통 군인이 사용하는 소총보다 10배는 더 비싸다고, 아내의 귓속에 설명해주는데 아내는 고개를 살짝살짝 끄덕이며, 애써 관심 있는 척 조금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흥미를 잃었는지 손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 혹시 흐트러지지나 않았을까 얼굴 화장을 체크한다. 그러나 아내는 그 다음 순서가 이어지자 생기발랄한 여고생처럼 활짝 웃으며 눈동자를 똥글똥글하게 만들어 강단에 집중한다.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와 함께 의장대가 퇴장하고, 개량한복과 카니발의상이 혼합된 화려한 의상의 남녀 20명가량이 몰려나오더니, 얼마 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캉캉힙합댄스를 춰댔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아줌마와 아가씨들의 기뻐하는 외침과 살짝 들썩이는 어깨동작이 파도처럼 출렁댄다. 화려한 조명, 현란한 춤동작. 이런 축하공연은 우리 때는 없었는데 확실히 요즘 사관생도들은 자유롭고 편해져서 너무 부럽다고, 나는 아내에게 말하지만, 내 말 따위는 듣는 둥 마는 둥 아내는 탄탄한 근육을 노골적으로 자랑스럽게 내보이는 남녀 댄서들이 수놓는 화려한 캉캉힙합댄스에 정신을 팔 뿐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하던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던 결혼 전 연애 때의 아내의 사랑스러움을 지금까지도 바라는 건 무리겠지? 단지 끝까지 내 말을 들어주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입학식이 끝나고 자연광으로 사진 찍기 좋은 두 시 쯤, 이런 날 요긴하게 쓰이기 나름인 개조한 야외공원에, 사이사이로 무늬만 귀빈 테이블이 즐비하게 늘어서고, 많은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저 애는 벌써 나오는데 우리 애는 왜 아직 안 나와? 라고 며느리가 안달하자, 아들이 다정하게 어깨를 감싸 주며, 곧 나올 거야, 라며 달래준다. 소대마다 가족면회 신고 시간이 약간씩 차이가 나서 그렇다고 내가 말해주려는데, 마침 저 앞에서 손녀가 걸어온다. 활기찬 걸음으로, 환한 미소를 머금고.

 

며느리는 마치 미아가 된 자식을 상봉하는 듯이 지 딸을 꽉 껴안는다. 아들 녀석도 다가가 두 사람을 함께 감싸주자 손녀가 다시 아버지를 껴안는다. 그 다음으로 할머니를 껴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인 나를 껴안는다.

 

“많이 먹어. 엄마가 직접 만들었어. 네가 좋아하는 빈자떡.”

 

며느리가 펼쳐놓은 시각적으로나 미각적으로나 더할 나위 없이 맛있는 음식을 다섯이서 오붓하게 쩝쩝대며 먹는다. 음식물을 입안에 가득 담은 채 아들 녀석은 정겨운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특별히 손녀의 성숙된 외모가 자랑스러운지 신기한지 좀 더 많이 담는다. 내 아내와 나는 며느리의 음식솜씨에 감탄하며 이것저것 맛보고 있는데, 며느리가 지 딸에게 빈자떡을 먹여주는 포즈를 취하자 나도 모르게 물끄러미 쳐다본다. 몇 십 년 전 바로 오늘 이곳, 정확히 말하면 그때는 이곳이 아니라 식당에서 면회를 했으니 장소는 다르지만, 우리 어머니도 똑같이 내게 먹여주셨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손수 만든, 빈자떡이 아닌 녹두빈대떡을.

 

“왜? 더 먹지 그래?” 며느리가 손녀에게 묻자 손녀는
“많이 먹었어. 엄마. 고마워.”
“왜 이거 밖에 안 먹어?”
“입맛이 변했나봐. 이젠 전통 빈대떡이 더 맛있는 거 같아.”
“얘가... 촌스럽긴.”
“왜 있잖아. 녹두빈대떡. 다음엔 그거 먹을래.” 손녀는 이렇게 말하며 나를 향해 씽긋 눈웃음친다.

 

손녀를 통해 언젠가 느꼈던 것을 방금 또 느꼈는데, 여간해선 아내와 자식 내외에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위해 말할 법도 한데 굳이 그러지 않는 이유는,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확인 할 수 없기 때문으로, 내 아내와 자식 내외는 생전의 내 어머니를 직접 대면한 적이 없어서, 어쩌다 추억의 사진과 동영상을 보기야 했겠지만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관찰했으면 모를까, 내 어머니의 눈매와 손녀의 눈매가 어쩜 그렇게도 똑같은지, 방금 떠오른 내 생각을 굳이 말하지 않는다. 왠지 비밀로 간직하는 편이 마치 나와 어머니만 아는 보물단지를 더욱 소중하게 꼭꼭 숨기는 것 같기 때문이리다. 남들이 다 가지고 있는 명품은 이미 명품이 아니듯이 많은 사람이 지켜야 하는 비밀은 더 이상 비밀 특유의 은밀한 반짝거림을 상실하는 건 당연한 이치다. 최근엔 이런 생각까지 든다. 손녀가 집안 식구들 그 누구를 막론하고 나와 가장 통하는 게 많은 것도 어쩌면 그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무의식뿐만 아니라 인격이나 성격조차도 유전자 여객선의 엄연한 탑승객이라는 정신의학박사들의 학설을 서울태생 ‘늘푸른솔잎’ 의학박사가 과학적으로 명쾌하게 증명했고 그 업적이 인정돼 노벨의학상을 수상했으니까, 나 같은 과학문외한이야 특별한 손해도 없는데 믿을 수밖에.

 

“할아버진 병과가 뭐였다 그랬지?” 손녀가 내게 묻는다.“수송선 운전” 나는 대답한다.
“그럼... 풍댕이 공중 유닛을 운전했겠네요?”
“맞아. 주로 그랬지. 아주 가끔은 지상 유닛도 운전 했구. 아마 이름이...”
“사슴벌레?”“아하! 맞다 그거. 지상 주력 수송 유닛 중에선 사슴벌레가 최고지. 아주 유명했어.”
“몇십 년 전까지 실전에 배치되었을 정도죠.”“요즘엔 새로운 유닛으로 대체 되었다지?”
“네. 일명 무당벌레라고 하는데요. 기동성과 활용성 측면에선 세계 최고라고 정평이 나 있데요.”

 

오랜만에 옛날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오를 무렵, 아내는 재미도 없고 관심도 없다는 흐리멍텅한 눈빛으로 또다시 자신의 명품 악어가죽 핸드백에서 손거울을 꺼내 메이크업을 한다. 사실 내 아들도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고 며느리도 아내도 모두 군대적인 것에는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이라서 지금 손녀와 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배려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옛날 생각에 빠져 손녀와 군대 얘기를 계속 해나가려고 먼지 쌓인 기억의 창고를 뒤척이는데, 상식이 있는 서울리언들 사이에 비록 사소하긴 하지만 동석한 여자의 기분을 배려하지 않는 나의 행동은 서울문명인으로서 합당치 못한 몰상식하고 무례한 행동이라는 정신적인 메시지를 받고서야 멈추고야 만다. 누군가 내 의식에 그런 생각을 던졌는데, 아마도 손거울을 보며 화장을 하는 아내가 그랬을 확률이 가장 크지만, 소다음료수를 홀짝홀짝 마시는 아들놈이나 미니컴퓨터를 꺼내 주가를 체크하는 며느리가 그랬을 확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나는 잠시 말을 멈췄고 그 순간 며느리가 딸에게 말한다.

 

“힘들지 않니? 왜 이런 걸 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모르겠다.”
손녀는 엄마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주며
“난 재밌는데. 아주 딱 내 체질이야.” 라고 말한다.
그러자 약간 신경질적인 목소리 톤으로 바뀌더니 며느리가 말한다.
“넌 사람 죽이고 파괴하는 게 그렇게 좋아?! 게다가 너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엄마를 끌어안고서 손녀는 말한다. 대견스럽게.
“다 내 가족과 이웃을 위해서 싸우는 거야.”
“그게 왜 너여야 하는데? 다른 사람이 하게 놔둬.”
“엄만... 그럼 왜 내가 하면 안 되는데? 정말 난 괜찮다니까. 이 학교 너무 재밌고, 지금 하는 전공도 내 적성에 딱 맞아.”

 

며느리와 손녀 사이에 내가 괜히 끼어든 게 아닌가 혹하면서도,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백화점 명품 쇼핑 얘기로 넘어가기 전에 얼른 꼭 한 가지 알려줘야겠다고 생각이 들어 끼어든다. 아무래도 며느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모르는 것 같아서다. 밀리터리 패션 조차 거부감을 느끼는 며느리가 아주 상식적인 군대사항조차 모르는 것도 당연하리라. 어쩌면 서울에 사는 일반인이자 여자가 전쟁과 군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안다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웬만한 남자는 그녀에게서 여성스러운 매력을 못 느끼므로, 그렇게 가정교육 받고 자라는 것도 이상할 건 없다.

 

“이 FR사관학교는 여느 군인 훈련소와는 다르단다. 이곳에서 배출되는 군인들은 주로 총대신 특수하게 설계된 마우스를 사용해서 적진에 투입된 각종 전투 유닛을 원격조종해서 전투를 수행한단다. 너도 봤잖니? 아까 의장대가 소총 대신 장갑같이 생긴 빅마우스를 가지고 마스게임을 하는 거. 이곳을 졸업한 군인들은 실제 전쟁이 발발하면 대부분 후방이나 군사비밀지역 중에서도 가장 안전한 지하벙커에 배치되어 원격조종으로 전투를 수행할 뿐이란다. 전쟁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적과 대면해서 싸우는 경우는 전혀 없어. 그래서 전혀 위험하지 않단다.”

 

나의 말을 찬찬히 들은 며느리의 슬픈 얼굴은 조금씩 보기 좋게 활짝 펴지며 안도의 화색이 돌자, 손녀도 한 수 거든다. “봐 엄마. 이 손으로 (아직 조막만한 손가락을 오물오물 움직이며) 마우스만을 잘 움직이는 게 내 임무야. 안전하게 지하벙커에 숨어서... 행여 전쟁이 발발해도 어쩌면 엄마보다 더 안전해. 하나도 걱정 마.”

 

며느리는 어처구니없게도 딸이 입학한 사관학교에 대해 너무나 무지했다고 책망하는 듯한 한숨을 내쉬고 살짝 흐른 눈물을 닦는다. 손녀와 며느리는 꼬옥 껴안는다.

 
 


이제 막 붉은 태양이 수평선을 넘어가고 있다. 공중셔틀버스를 타고 갈 나만의 행복한 생각에 빠져있는데, 집에까지 태워주겠다는 아들 내외의 호의를 뿌리칠 수 없다는 아내의 강압도 영향이 있었지만, 전에 며느리가 내게 부탁한, 손녀가 FA사관학교에 입학하는 걸 거짓말을 해서라도 말려달라는 걸 들어주지 못 한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감히 며느리의 요구라면 무엇이라도 거부할 수 없는 찜찜함이 남아서, 아들이 운전하는 자가용을 타고 집으로 향한다.

 

아들은 차량용 신형 AI와 서울시 교통부에서 설치한 운전을 도와주는 외부 시스템의 안내로 최소한의 주의를 기울여 운전하고, 며느리와 아내는 어느덧 잠들어 버렸지만, 나는 피곤하기는 한데 이상하게도 눈이 감길 정도는 아니다. 지금 지나는 거리도 내가 전에 와보지 못한 인도계 이민 후손들이 주로 거주하는 주거지인데 나름대로 소박하면서도 이국적인 정취가 느껴져서 좋긴 한데, 그것 때문에 잠들지 못하는 건 아니다. 며느리에게 손녀가 들어간 군대생활의 실체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게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다.

 

물론 손녀의 복무기간동안 실제 전쟁이 발발하지 않다면야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에 굳이 필요이상의 걱정을 끼칠 이유가 없다고 자위한다. 전쟁이 발발하면 손녀 같은 군인들은 지하벙커에서 마우스로 원격조정을 해서 전쟁을 치르는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의 방에 컴퓨터 앞에 편안히 앉아 ‘스타크래프트’나 ‘카운터스트라이크’ 같은 고전 클래식 게임을 하는 차원과는 전혀 딴판이라는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 전투에 참여하는 군인들에 비해 확실히 적에게 생명을 담보로 대면하지 않는다 뿐이지 손녀 같은 빅마우스 군인들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는 위험상황과 맞닥뜨린다. 인간의 집중력과 생존력과 파괴본능 같은 것들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군사전문가들과 과학자들이 오랜 연구 끝에 고안한 것이, 구석에 몰린 생쥐도 고양이에게 대든다는 속담이 말하듯, 쉽게 말해 빅마우스 군인을 극도의 심리상태로 몰아넣는다. 육체적인 궁핍과 정신적인 괴로움에 봉착해야만 인간은 동물적인 전투력을 십분 발휘한다는 ‘전투력향상이론’ 때문이다.

 

즉 전쟁이 발발하면 빅마우스 군인들은 독방에 가둬지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절대로 열어주지 않는다. 끓는 물을 부어 먹어야 하는 야전식사만을 천장을 통해 넣어줄 뿐이다. 게다가 잠도 편히 못 자도록 언제 기상나팔 음이 독방을 쩌렁쩌렁하게 울릴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 하게 한다. 심지어는 거짓 전시상황 뉴스를 내보내 빅마우스 군인들을 더욱 정신적인 압박상태로 몰아붙인다. 그래야만 그들이 조정하는 전쟁 유닛의 최소 피해로 최대의 전적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수많은 경험 데이터에 의해 확인되었기 때문에 어떤 국가인권의나 정신과의사들의 조언도 무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빅마우스 군인들은 신체적인 외상은 전혀 없지만, 나중에 제대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극심한 정신병에서 걸렸다는 진단을 받고 놀라는 경우도 적지 않다. 통계에 따르면 모의군사훈련 2개월을 할 때마다 5퍼센트의 군인의 뇌에 정신적인 충격의 흔적이 강렬하게 새겨져 이후의 인생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준다고, 양심적인 정신과 전문의가 실토한 적이 있을 정도다. 실전에서 수송선을 운전했던 나조차도 단순히 각종 전투유닛을 실어 나르기만 했을 뿐인데, 내 전우들 몇 명이 전쟁이 끝나고 제대해서 정신병원에 입원한 경우를 종종 보았을 정도다.

 

국가에서 빅마우스 군인들은 100% 안전하다고 홍보하지만 어디까지나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을 경우이다. 그리고 무인도에 떨어져도 몇 달간 생존할 수 있는 정신적으로 튼튼한 뇌를 타고난 인간의 경우에 해당하는 말이다. 다행히 나는 커다란 문제 없이 살아남았고, 내 핏줄인 손녀도 나를 닮아 그럴 수 있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손녀가 아무런 정신적인 상처 없이 무사히 제대하기를, 물론 부차적인 바램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야만 내가 며느리를 만나서도 지금처럼 찜찜한 미안함의 감정이 들지 않을 테니까.

 
 
 

원주>
1. FR사관학교: 2xxx년에 창설된 일종의 외인부대형 사관학교. 설립자는 전설적인 천재 게이머선수 ‘울부짖는 우레’씨로 15년간의 선수생활과 은퇴 후 지도자 생활로 벌어드린 개인 사재를 털고, 그 당시만 해도 백해무익한 해프닝이라고 조롱을 받았지만, 막상 실전이 발발해서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 혁혁한 전과를 올려 나라를 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로가 인정되어 국가로부터 지원받은 재원과, 컴퓨터 게임 산업과 관련된 수많은 대기업들과 전국PC방노조연맹 등의 기부금으로, 현재까지 왕성하게 운영되고 있다.

 

2. ‘FR사관학교’에서 ‘FR’의 어원: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런 전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전해진다. 그때까지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스포츠 스타 F1 드라이버, 강원도 소라두람 마을에서 베트남계 어머니와 한국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질주번개 오름’씨를 근소한 차이로 앞질러 전 세계 젊은이의 우상이 된 천재 게이머선수 ‘울부짖는 우레’씨에게도 한때 깊은 슬럼프에 빠져서 게이머선수의 꿈을 포기하려했다고 한다. 그때 자신에게 힘을 준 이가 있었으니, 흔히 동화책이나 충무로 고전영화에서 볼 수 있는 여자친구와의 사랑에서 싹튼 뭔가가 아니라, 우레 선수는 5남매 중에 막내였는데 큰 형님의 일곱 살 먹은 아들의 한 마디 때문이라고 한다. “삼촌, 왜 물고기방에 안 가 있어? 나 친구들한테 삼촌이 물고기방에서 제일 쌔다 그랬는데...” 이 말을 들은 우레 선수는 ‘물고기방’이 뭐냐고 물었더니 조카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고 한다. “물고기방도 몰라? PC방. 피씨방. Fish 방... 히히.” 조카의 뜻하지 않은 농담에 용기를 얻은 우레 선수는 그때를 떠올리며 자신이 설립한 사관학교를 물고기방, Fish Room, 그래서 FR사관학교라고 명명하게 된 것이다. 그의 유일한 여자친구라고 주장하는 스물 대여섯 명의 여자들 중에 몇 명이 받은 연애편지에 비슷한 얘기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의 진위를 떠나서 이 이야기는 왠지 사실로 인정하자는 게 게임역사학자들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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