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에 만든 이미지

 

 

(2007년 9월 18일에 적었던 글을 약간 수정해서 재업)

 

 

하루는 시커먼 전투복 전사 엑스트라 천지. 하루는 이무기 보고 놀라 줄행랑치는 시민 엑스트라 천지. 돌이켜보면 가장 분주했고 가장 화려했고 가장 폼 났고 가장 정신없었던 촬영 장소는 LA 시가지였다. 장단점이 있었다. 스케일이 크면 클수록 섬세한 맛은 떨어지고 필자의 존재감은 개미만해졌다. 모두 정신없었다. 자신의 역할에 행여라도 빵구나지 않도록 열심히 일하기 바빴다. 언젠가 말했지만 촬영지에선 스케일이 클 때 조감독이 빛을 발한다. 조감독 조나단, 스스로도 폼나하고 자신의 직업에 뿌듯함과 재미를 맘껏 느꼈을 곳은 LA 시가지였을 것이다. 그의 최상위 경력,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타이타닉’ 만큼은 아닐지라도.

 

 

그렇더라도 감독 포스를 앞지를 수는 없는 이치. 심감독은 차분하게 촬영장을 이끈다. 제 아무리 잘나가는 조감독 조나단, 촬영감독 휴버트라고해도 심감독이 여러 투자자에게 끌어모은 돈으로 비싼 개런티를 치르고 고용한 계약직원일 뿐이다. 제작, 감독을 병행한 심감독 포스는 굳이 LA 시가지 촬영장에서 가시적일 필요는 없다. 심감독은 모니터 앞에서 최종 OK 사인만을 하면 된다. 그것이 감독의 포스고 그 결정은 영화의 성패를 좌우한다.

 


아침 7시부터 촬영준비로 분주했다. 전날 미리 토의를 했지만 재확인한 조나단은 스탭들을 리드했다. 촬영팀은 휴버트의 지시로 움직였다. 카메라 위치가 정해지고 조명이 배치된다. 30~40분 잡아먹는다. 엑스트라는 조용히 기다렸다. 익숙한 누군가 책을 읽었다. 군대도 갔다오지 않은 이들이 참 질서 있고 차분했다. 어쩌다 영화에서 볼 법한 튀는 사람은 없었다. 그랬다간 다음 촬영부터 고용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간혹 튀는 엑스트라가 등장하고 그의 할리우드 입신양명기를 상상해보지만 그런 일은 흔히 발생하지 않는다.

 


영화 '크래쉬(2006)'에서 미국 특히 LA는 수많은 인종들로 바글바글하고 인종, 민족 갈등을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다. 그랬다간 언제 총부리 과녁이 될지 모른다. 동양인이 할리우드에서 감독으로 활동하기란 하늘에 별타기처럼 어렵다. 서양인, 미국인 중에서 고르고 고른 후보도 쌔고 쌨는데 굳이 실력이 검증되지 않은 동양인 감독을 선택할 이유는 없다. 충무로에서 활동 중인 감독이 거의 한국인인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문화, 사고방식이 달라서 액션, 호러 장르로 한정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예외는 있다. 전 세계가 인정하는 명감독 ‘이안’이다. 그런 그도 영화 '헐크'에서 이름에 걸맞지 않는 작품을 내놓았다. 할리우드 제작 시스템에 책임회피할지라도 영화 성패 책임은 감독의 몫이다. 라디오는 DJ 작품, TV 드라마는 드라마작가 작품, 연극은 배우 작품, 영화는 감독 작품이란 얘기가 전해진다.

 


심감독은 조나단, 휴버트에게서 촬영 준비가 다 되었다는 보고를 받는다. 공격수가 골문으로 킥을 찰 수 있도록 준비가 된 것이다. 심감독의 느슨한 눈빛에 생기가 돋는다. 프리미어 리그 ‘마이클 오웬’같이 변신한다. 기질적으로 악동 ‘루니’를 닮지는 않았다. 심감독의 "액션!"을 받아 퍼스트 카메라 기사는 필름을 돌린다. 나머지 선수들(주연, 조연, 엑스트라)는 심감독이 골을 넣을 수 있도록 각자 역할에 전념한다. 슈팅(shooting), 원 모어 타임(one more time), 테이크 투(take 2), 킵(keep),... 심감독, 촬영감독, 조감독은 모니터 앞에 나란히 앉아있다. 그 옆에 야무진 여성 스크립터는 촬영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다.

 


"오케이!" 심감독이 단오하게 외친다. 골인이다. 비슷한 앵글이 필요하면 더 찍고 아니면 카메라를 옮긴다. 덩달아 조명도 재배치되고 조나단도 딸린 식구들(연출팀)에게 지시한다. 스탭, 배우, 엑스트라도 자신의 역할을 찾아간다. 이렇게 반복된다. 최종 결정은 감독이 한다. 실제 축구와 다른 점은 촬영장에선 감독만이 골인을 넣을 수 있다는 점이다. 게임에 지면, 즉, 영화가 실패하면 감독 책임이 크고, 성공하면 감독이 잘했기 때문이다. 영화가 그렇다.

 


종소리는 꿀맛이다. 학창시절 4교시를 마치는 종소리는 특별히 아름답다. 그런 종소리였다. LA 마천루를 헤집고 먼 곳에서 종소리가 날아왔다. 환청인지 실제인지 규명할 것까지야 없지. 짠밥이 안 되는 필자는 정원에 제한이 있는 승합차 탑승을 거부하고 베이스캠프까지 걸어간다. 대개 베이스캠프와 촬영장의 거리는 꽤 먼데 간혹 가까운 경우도 있었다. LA 시가지 촬영지가 그랬다. 걸어서 5분 거리다. 서울 시내버스 한 정거장 거리보다도 짧았다. 단성사에서 YMCA 가는 거리 정도였다. 종로보다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이 적어서 좀더 멀어보일 수는 있다.

 


널찍한 주차장 한 켠에 노천 식당이 마련되었다. 군대에선 줄을 잘 서야 한다. 사회에서도 그렇다. 디워 식당도 다소 그렇다. 오늘처럼 스케일이 클 때는 좀더 그렇다. 미세하지만 잘 구워진 스테이크지만 운 없으면 몇 분 기다려야 하고, 연어 생선 구이를 선택했다가 배 속에 물고기가 들어갔는지 감이 오지 않아 다시 배식 줄에 서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주요 스탭과 배우들이 식사를 마칠 쯤에 30~40명 엑스트라가 이무기보다 길게 줄섰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군대줄이 떠올랐을 때는 소량 배급된 한국 식단에 반드시 들어가는 그게 바닥났을 때이다. 김치. 심감독과 한국 스탭만큼 고프지는 않았지만 집어넣지 않으면 니글니글한 식후가 느껴지곤 했다. 김치 없이 라면 먹을 때와 비슷했다.

 


오늘 따라 예쁜 여자들이 주변을 에워쌌다. 금발을 늘어트린 늘씬한 서양 여자, 계란형 얼굴에 갈색 생머리를 늘어트린 한국 여자, ‘스칼렛 요한슨’ 단발에 얼굴은 약간 떨어지지만 몸매는 ‘제시카 알바’ 뺨치는 이태리 출신 느낌 여자, 그녀들과 유쾌한 대화를 즐긴다. 통역이라는 징검다리를 통해서이긴 하지만 워낙에 친근감이 많은 성격인지라 그녀들은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필자일 리 없다. 심감독이다. 물론 감독이라는 명함 때문에 그녀들에게 관심을 받는 이유도 컸을 것이다.

 


디워 LA 촬영 프로듀서는 현지 시민권 재미교포였다. 잘은 몰라도 그들은 미국 현지에만 관여하는 것 같았다. 대니스. 제임스. 대니스는 듬직하고 서글서글한 성격, 제임스는 작지만 야무지게 똘똘하지만 얌채처럼 보였다. 대니스는 영어를 잘했다. 당연하다. 한인2세였으니까. 바꿔말하면 한국어를 거의 모른다는 뜻이다. 대화가 안된다. 영어로 해야 통한다. 필자와는 좀 통하는 부분도 있었다. 필자가 영어를 잘해서가 아니다. 심감독이 영어를 못 해도 여러 사람과 친해지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대니스도 심감독 못지않게 은근히 친근감이 많았다. 사람 좋아 보였다. 겪어보니 겉으로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그런 성격으로 느껴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필자가 디워 메이킹에 참여할 수 있었던 과정의 시작은 대니스였다. 그렇다고 대니스와 필자가 특별한 친분이 있었던 건 아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시리즈 글의 첫 번째 글(아래 관련글 링크)에 올렸었다)

 

 

 

관련글: [추억] 영화 '디워(D-War, 2007)' 관련 OCN 다큐을 보고...

 

 


필자는 디워 촬영 전에 LA에서 독립영화에 참여했었다. 국내 독립영화처럼 무보수였지만 경험을 쌓고 싶었다. 국내 미대 졸업 후 미국 유학 졸업하고 서부개척에 올인했다. 할리우드에서 영화감독으로 입성하겠다는 개척정신이다. 필자가 아니라 ‘강영만’ 감독의 간단한 프로필이었다(이 시리즈 글의 첫 번째를 참고). 택시 운전 아르바이트도 했고 광고회사에 근무하며 영화감독 금자탑을 차근차근 쌓는 매우 열정적이고 성실한 젊은 감독이었다. 그때 제작하고 있던 독립영화는 제법 규모가 있는 편이었다. 총제작비가 5천만원 안팎이었을 것이다. 총 3개 에피소드로 이뤄졌는데 필자는 LA 촬영 때만 참여했다. 스탭이다. 주인공은 에피소드마다 다르다. 해변가 장면, LA 장면들에만 참여했고 사막 배경과 격투 장면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켈리 해밀튼(Kelly Hamilton)’은 여주인공 ‘이브’이다. 키는 155 정도 귀엽고 섹시하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달리 느껴지겠지만 사진보다 실물이 더 예쁘다. 필자가 켈리에게 했던 말은 두 개다. "브리트니 스피어스 닮았어요." 첫 번째 말이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처럼 섹시하고 매력적이예요' 라는 뜻이었다. 켈리는 활짝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필자의 말을 옳게 받아들인 거였다. 또는 LA 에티켓일 것이다. 그때 촬영감독이 옆에서 필자의 말을 듣게 됐는데 나중에 그의 조언은 뜻밖이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닮았다는 말은 켈리만의 개성이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어." 생각해보니 그랬다.

 


추가로 다른 곳에서 알았는데 이런 뜻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도 있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처럼 천방지축 성격에 괴팍한 스타 기질이 엿보이네요." 여자에게 인기 많은 쿨가이의 조언대로 여자를 칭찬하고 싶다면 '예쁘다'라는 본체에 자신만의 약간만 독창적인 화룡점정을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어떤 유명인과 비교하는 자체는 좋지 않은 방법이다. 아무튼 필자의 말은 그저 그녀의 외모가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말한 것 뿐이다. 다른 숨은 뜻은 없었다.

 


켈리를 촬영 때 실물로 봤던 필자와 달리 사진만을 보게 되는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 잘 모르겠다. 얼핏 듣기로 켈리는 LA 태생이 아니었다. 소위 할리우드 배우 성공을 꿈꾸고 LA로 이주한 지방출신이었다. 도시 때가 덜 묻은 순수한 인격이란 뜻이다. 전에 말했던 ‘조엘(Joel)’과 비슷한 면도 있었다. ‘라스트 이브’ 첫 촬영지는 그녀의 실제 아파트였다. 15평 정도, 켈리처럼 작고 아담했다. 일주일 촬영 내내 성실히 연기에 몰두했다. 마지막 촬영, 건물의 옥상이었는데 거의 누드씬도 프로지망생답게 당당히 연기했다. 켈리는 성실하고 재능있는 배우였다. 그러나 그녀에겐 결정적인 단점이 있었다.

 

 

"고달프고 불확실한 배우를 굳이..." 누구나 그렇게 권유했을 법한 단점이다. 켈리는 학창시설 교통사고를 당했다. 남자친구 차는 박살났다. 둘은 헤어졌다. 켈리는 목소리를 잃었다. 다행히 성대는 울리지만 여자목소리가 아니었다. 거슬릴 정도로 허스키하다. 보통 직장생활에서는 고객과 대면해야하는 업무가 아니라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지만 배우로서는 문제가 될 것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영화에 그대로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 점에 대해 스탭 한 명이 물었을 때 켈리는 대답했다. "더빙하면 괜찮아요." 배우 되는데 전혀 문제될 게 없다는 신념도 덧붙였다. 켈리가 배우로서 꼭 성공하기를 바랬다.

 

 

 

 

남자 주인공 아담은 ‘조든 리 쿠(Jourden Lee Koo)’이다. 이브를 유혹하는 뱀은 ‘프레디 밀리건(Freddie Miligan)’이다. 두 배우는 오디션에서 최후까지 강영만 감독을 고민케 했다. 미남이며 매너 좋은 샌님 조든 리 쿠는 동양인 피가 섞인 혼혈이다. 촬영 마지막날 전 스탭과 일일이 포옹하며 작별인사했다. 그러나 쫑파티는 불참했다. 다른 영화 촬영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프레디는 남미인인데 겉보기에 한국의 터프가이처럼 과묵했다. 남자다운 매력이 은은하게 풍겼다. 어떤 스타일을 더 좋아하는지는 여자들 나름일 것이다.

 


디워 LA 시가지 촬영 때 엑스트라로 참가하려고 왔다가 조나단 연출부 막내 아더(Arthur)의 땍땍거림이 재수없다며 가버린 자칭 쿨가이 ‘메이슨(Mason, 고교때부터 미국생활)’이 프레디를 높이 치켜세우고 조든을 그저그런 평범한 배우라고 열변했다. 메이슨은 강영만 감독과 형동생하는 친한 사이고 최종 오디션부터 쭉 두 남자배우를 지켜봤었다. 필자의 입장은 '데이터 부족' 이다.

 

 

 

 

뱀과 이브, 프레디와 켈리가 사랑을 나누는 으리으리한 저택은 실제로 LA 에서도 부유층이 산다는 동네이다. 할리우드 유명 배우, 부호들이 셔츠차림으로 지나칠 것 같은 산중턱 동네였다. 달랑 종이지도만을 보고 찾아가는데 고역이었다. 꼬불꼬불 산길도 그렇고,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고, 일방통행도 많아서 후진도 자주했다. 저택은 저택이다. 산중턱을 깎아서 테니스장 겸 농구장을 만들었다. 그 위에 장난감 오리가 떠다니는 풀장이 있고 그 둘레를 2층 저택이 감싼다. 크다고 볼 수는 없지만 '집 짓느라 생노가다 했겠다. 돈도 엄청 많이 깨졌겠고.'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뱀(프레디 분)은 이 저택에서 많은 여자와 환락 파티를 했다. 열댓 명 단역 여배우 중에 네 명의 동양인이 있었다. 메이크업 스탭인데 몸매가 좋아서 수영복 입고 연기한 한국여자, 누가 봐도 섹시하다고 볼 수 있는 한인 여배우 지망생 ‘스타 유(Star Yoo)’, 작은 체구지만 당돌하고 저돌적이고 열정적인 중국계 여배우 ‘제이드 유(Jade Wu)’, 키 크고 늘씬한 체형이지만 얼굴은 배우로서 딸리지만 여배우 중에 강영만 감독과 가장 친한 중국계 여배우 (이름 모름)가 그들이다.

 


꼭 이 경우만으로 단정 짓는 건 아니다. 쫑파티 후 술집에서 초면 vip고객과 너무도 자연스럽게 친화력을 발휘하는 재능은 칭찬받을 만하다. 네 번째 중국계 배우는 필자의 느낌으로 배우보다 기획, 제작, 마케팅이 적성에 더 맞아 보였다. 그녀는 이 저택 주인 딸과 친한 학우였다. 그래서 강영만 감독은 공짜로 근사한 로케이션을 사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점심 때 백인 주인은 공짜로 바베큐와 뷔페를 제공해주기도 했다.

 

 

오후 촬영 한창 때 저택 딸이 귀가했다. 20대 중반, 금발, 키는 160 플러스 마이너스, 얼굴은 여배우 뺨쳤다. 촬영 메이크업을 전혀 안 했는데도 바비 인형처럼 보였다. 바비인형. 인형이 필자 앞으로 걸어온다. 저택 구조상 필자 앞을 지나쳐야 해서 지나쳐간 것뿐이다. 어쩌다가 필자의 시선과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 ! ... 그녀는 고개를 휙 돌려 총총히 자신의 2층 출입문으로 사라졌다. 국내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월미도에 놀러간 주인공 여자들에게 접근한 동남아시아 남자들을 바라보는 ‘이요원’의 내면적 시선, 그거였는지도 모른다. 필자의 비약인지도 모른다. 아애 그녀의 시선에 필자는 존재 하지 않았고 다른 것을 보고 2층으로 올라갔는지도 모른다.

 

 

 

 

또 한 명의 중국계 여배우 ‘제이드 유(Jade Wu)’는 독특했다. 특별했다. 열정이 각별했다. 학창시설 짱 먹었을지도 모르는 성격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삼합회 여자 짱까지는 아닐 것이다. 실제로는 상냥하고 부드러운 편에 속하는 여자였다. 제이드에게 풍기는 인상이 한 몫 했을 것이다. 제이드는 저택 장면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 뱀이다. 남미계 남자배우 프레디가 아니라 실제 뱀이다. 파충류 뱀. 아무리 연기라지만 웬만한 여배우라면 "감독님 저를 선택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다른 촬영과 겹쳐서..." 혀를 낼름거리며 기다리는 뱀을 외면할 것이다. 이해한다. 뱀 옆에 서 있어도 오금이 저린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다. 제이드는 강영만 감독의 연기지시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재연드라마의 편집을 위한 연기가 아니라 진짜로 진솔한 연기였다. 제이드는 뱀을 온 몸에 휘감고 춤췄다. 춤추는 동작이 말한다. "뱀 때문에 몸이 굳어서 춤이 잘 안돼" 가 아니라 "그동안 합숙하며 맞춘 춤실력 발휘 하자. 끝나고 달콤한 살아있는 쥐 먹여줄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저택 씬에는 없었고 영국 리포터 역으로 출연한 일본인과 영국인 혼혈 여배우도 있었다. 키 176, 금발, 생머리, S 라인보다 마른 체형, 얼굴은, 필자 생각에 라스트 이브 출연 여배우 중에 가장 예뻤다. 그녀는 촬영장에 오자마자 강영만 감독과 포옹했다. 그냥 인사이고 에티켓일 뿐이다. 좀 떨어진 곳에 그녀 남자친구 느낌의 백인 남자가 주차를 마치고 서성거렸다. 부러웠다. LA에서 독립영화 감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미국 코메디 영화에서 종종 상대방의 얼굴에 던지는 사과파이, 디워 디저트로 인기만점이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줄 잘못서면 사과파이는 국물도 없었다. 원래 사과파이는 국물이 없는 거지만 디워 메뉴에선 그렇다. 의외인지 몰라도 조감독 조나단은 사과파이를 챙기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 설탕에 절인 듯한 달작지근한 사과파이와 나이 50 다혈질 아저씨가 얼른 매칭이 안 된다. 어쩌면 담배를 끊은 지 얼마 안 되는지도 모른다. 담배를 끊으면 단 음식이 고프다고 들었다. 촬영감독 휴버트는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는 잘 모르겠고, 심감독은 달짝지근한 음식을 꽤 싫어한다고 들었다. 영구를 떠올리면 사탕을 입에 붙이고 다닐 것 같은데 전혀 반대였다. 유럽쪽 음식은 더 싫어하는 편이었다. 심감독은 식사를 하다가 대뜸 "이건 약과야. 유럽 가면 더해. 계네들 음식은 너무 달아서 머리가 아플지경이야." 라고 말하기도 했다.

 


심감독은 식사를 마치고 주변을 에워싼 여자들과 담화를 나눴다. 여직원이 통역하고, 프로듀서 대니스, 제임스가 거들었다. 그렇다. 심감독을 에워싼 서너 명의 늘씬한 여자들은 배우지망생이었다. 대니스와 제임스가 소개시켜주려고 데려온 것이다. 꼭 디워 필름을 위해서가 아니라 언젠가 다른 작품을 위한 인맥이었다. 충무로를 포함 전 세계 어느 영화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매번 촬영장에 배우지망생이 들락거리지는 않았다. LA 시가지 촬영은 꽤 근사했다. 폼났다. 필자가 감독이라도 다른 날보다 그날을 택했을 것이다.

 

 

 

 

정말 많았다. 뜻밖의 방문자들이 LA 시가지 촬영 때 많았다. 강영만 감독도 왔고, 처녀작을 라스트 이브로 선택한 메이크업 출신 연기지망생도 왔고, 실제 뱀과 춤추는 연기를 펼쳤던 여배우 제이드도 보였다. 뱀과는 진작에 쫑냈단다. 그렇다고 숯불에 어떻게 했다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강영만 감독이 온 경로는 대니스 프로듀서 인맥이었다. 둘은 영화 공부를 같이 한 동창이라고 들었다. 라스트 이브 트레일러에서는 잘 안 보이지만 단역으로 잠깐 출연한 ‘토니 영 (Tony Young)’, 아이큐 높은 사람 특유의 행동, 어수선한 시선도 여전했다. 사실 토니의 전공은 시나리오 작가였다. 태국 출신이지만 영어 발음이 매끄러운 걸로 봐서 미국에서 태어난 2세로 보였다. 강영만 감독과 여러 편 협업했다. 서로 상부상조하는 파트너라고 할 수 있다. 똑똑한 냄새는 혜성 꼬리처럼 늘어뜨리고 다니는 토니, 라스트 이브 때 그와 친해질 기회가 없어서 아쉬웠다. 서로 뭔가 통하는 부분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은 좋은 기회다. 필자도 시나리오를 끄적이는 사람으로서 토니 같은 똑똑한 친구와 인맥이 되어서 나쁠 건 없다. 필자는 심감독 모니터 뒤에서 뒤꿈치를 들었다 내렸다 흘끔 흘끔 쳐다보는 강영만 감독 일행 쪽으로 다가갔다.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어색하지만 슬쩍 토니와 인사를 나누려는데, 그는 필자를 처음 보는 사람 대하듯 했다. 그 사이에 필자는 헤어를 짧게 깎았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가뜩이나 찍을 촬영분도 많은데 찾아오는 이들은 끝없이 이어졌고. LA 또는 미국에 심감독과 직간접적으로 관련 있는 이들은 거의 온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았다. 이후에 다른 촬영지에도 다른 이들도 방문했으니 말이다. 제3자에게 듣기로 심감독은 LA에 많은 인맥이 있었다. 그 중에 투자자도 속해 있다. 그들 중 몇몇도 방문했다. 그들에게 친절하게 부담스럽지 않게 대하는 것은 심감독의 장기다. '식은 죽 먹기지. 내 본업이 사람 즐겁게 하는 거니까.' 그들또한 30분 안에 떠나는 게 에티켓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다들 매너를 지켰다. 워낙에 시간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혹시라도 시간이 모자라 중요한 장면을 찍지 못 하면 몇 억을 추가투여해서 재촬영을 해야 한다. 억은 자일리톨 껌 새 브랜드 명이 아니다. 심감독은 언젠가 필자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거 찍느라 얼마나 힘들게 투자 받았는지 아냐? 말도 마. 평균적으로 이익 배당 주는 것보다 더 주기도 하고 겨우 투자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냐." 어쩌면 장사꾼이 "이거 완전 밑지고 파는 거에요" 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심감독은 투자받기 정말 힘들었다는 것을 어필하고 싶어던 것이다. 그만큼 힘들었고 가슴앓이를 심하게 했었던 것 같다.

 


유별한 ‘제이드’는 한 껀을 건진다. 강영만 감독과 친구들은 돌아갔지만 제이드는 남았다. 대니스와 본래 아는 사이였는지, 오늘 강감독을 통해 소개받고 친해졌는지 모르지만, 대니스를 통해 조나단에게 심감독에게 짧게 소개됐다. 촬영은 계속됐다. 열정적인 제이드는 스스로 기회를 잡았다. 표범처럼 기회를 노렸다. 나름 친근감이 있는 편이었다. 눈치도 검은 띠 이상이었다. 겉으로겠지만 조나단과도 친해졌다. 조나단도 딱히 잘못을 지적할 수 없는 제이드를 여자인데 여러 눈도 있는데 매몰차게 귀찮으니까 멀리 떨어지라고 말하지는 못 했다. 제이드도 영화 현장 경험이 많으니 언제 들이대고 언제 물러나야 하는 것 쯤은 귀신처럼 빠삭할 것이다.

 


"오 마이 갓! 왓 워즈 댓! (Oh my God! What was that!)" 제이드는 해냈다. 엑스트라 중에서도 운발 좋은 이가 한다는 단독샷을 하게 됐다.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 제이드는 3초 정도 LA 시민 중에 정차한 상태에서 차문에 기대어 하늘을 나는 이무기 또는 불코를 발견하고 비명을 지르는 장면에 출연했다. 한번은 뱀을 온몸에 칭칭 감고 춤추더니 이번엔 초 왕뱀 뻘 이무기 보고 놀라는 시민역할을 한 셈이다. 제이드는 뱀과 인연이 깊은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꽃뱀은 아닌 것 같았다. 꽃뱀을 하기에는 너무 꽃뱀처럼 생겨서 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한편, 이 장면이 최종 편집본에서는 빠진 것 같다.

 


제이드는 또 왔다. LA 시가지 촬영 이후 다른 촬영지에도 왔다. 부라퀴가 아트록스 군단에게 연설하고 진격을 시작하는 장면을 촬영하는 사막형 언덕이었다. 이 촬영이 먼저인지 LA 도심지 촬영이 먼저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제이드가 방문한 것과 엑스트라로 출연하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필자는 촬영 장면을 부감으로 담기위해 약간 높은 언덕중턱에 올라갔다. 한참 찍고 있는데 제이드가 필자 쪽으로 올라왔다. 높은 곳에서 넓게 보고 싶었고 잠깐 쉬고 싶었던 것이다. 제이드와 필자는 라스트 이브로 안면이 있는 정도다. 그것은 중요치 않았다. 제이드는 촬영장의 누구든지 친구 인맥 쌓기 대상이었다. 대뜸 필자에게 말했다. 꼼지락 뭔가를 꺼내면서 "플리즈 라이터?(영어)". 그녀가 꺼낸 것은 담배다. 필자에게는 라이터가 없었다. 남자로서 그녀에게 에티켓을 지켜주고 싶었다. 잠깐 기다려보라고 하고 필자는 먼지를 흩날리며 언덕중턱을 내려갔다.

 

 

 

 

근처에 어떤 한국 스텝에게 가서 라이터 좀 있냐고 물었더니 그도 담배를 피지 않아서 없다고 했다. 그 옆 스탭도 그랬고 대니스도 마찬가지였다. 한참 바삐 일하는 서양 스텝에게 물어보기도 뭐하고 고민이었다. 한국 스탭 네다섯 명에게 물었더니 모두 없었다. 제이드는 언덕에 앉은뱅이 자세로 앉아 필자를 기다렸다. 필자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뱀을 온몸에 휘감고 춤추던 연기의 미소는 아니었다. 강렬하고 매서운 연기를 하는 여배우라도 어느 순간에는 여성적인 순수미를 발산할 줄 알았다.

 


제이드는 활짝 웃으며 필자에게 손짓했다. "괜찮아요. 땡큐!" 그래도 자신에게 라이터를 가져다주려고 이리저리 수소문하는 필자에게 약간 감동한 것인지도 모른다. 필자의 과한 에티켓은 군대 시절 졸병 때나 했을 법한 것이었다. 마침 아트록스 부대가 운집한 곳에서 군대 졸병 시절이 떠오르니까 실없는 미소를 짓게 되었다.

 


필자는 제이드 옆으로 갔다. 라이터를 빌려주지 못 해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제이드는 생기있게 웃으며 친한 친구처럼 내 몸을 톡톡 두드리며 괜찮다고 말했다. 전에 그러니까 ‘라스트 이브’ 촬영장에서는 이런 적이 없었다. 처음이었다. 제이드의 눈빛은 달랐다. 뱀의 눈빛이 아니라 사슴 눈빛이었다. 좀 부담스러웠지만 나쁠 것도 없었다. 만약 필자가 중국어, 영어 둘 중 하나를 유창하게 했더라면 제이드와 좀더 친해졌을지도 모른다. 여자친구가 아니라 영화 동료로서 말이다. 제이드의 탁월한 캐릭터성을 칭찬하지만 필자가 진심으로 사귀고 싶은 애인 타입은 결코 아니었다.

 

 

제이드는 LA에서 봤던 여배우 중에 꽤 특이하고 독특하고 개성이 뚜렸했다. 아직까지 한국에서 제이드와 비슷한 캐릭터를 못 봤다. 제이드가 할리우드에서 성공하기를 바랬다. 필자 생각에는 짠하지만 스스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며 당당한 ‘켈리 해밀튼’보다는 제이드가 좀더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켈리도 잘 되길 바랬다.

 

 

 

 

‘스타 유(Star Yoo)’는 1.5세대 재미교포였다. ‘라스트 이브’가 첫 출연은 아니었다. ‘라스트 이브’ 촬영 몇 달 전 국내에 나왔었지만 몇 달 후 LA로 돌아갔다. ‘스타 유’는 한국말을 곧 잘했다. 짐작으로 고등학교부터 미국에 살았던 것 같다. 한국어 어휘를 들어보면 그래 보였다. 스타 유와 몇 마디 나눠봤다. 필자는 LA에서 영화 관련 일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스타 유가 물었다. "계속요?" 필자는 대답했다. "가능하다면." 스타 유는 어떤데라는 필자의 물음에 그녀는 "저도 계속 해보려고요. 미국에서 배우로 성공할거에요." 당시 미국 메이저 방송 드라마 순위는 ‘CSI’, ‘로스트(Lost)’, ‘위험한 주부들(Desperate Housewives)’,... 박빙 다툼이었다. 배우 ‘김윤진’은 미국 문화에 익숙한 ‘스타 유’에게 미국에서 여배우로서 성공하겠다는 희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필자는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라 물었다. "한국에 갔었다고 했는데 왜 몇 달 만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어요?" 스타 유는 굳어지는 표정을 잠재우며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필자의 실수였다. 묻지 말아야할 질문을 던진 것이다. 악의는 결코 없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었는데...

 

 

‘스타 유’는 디워 쫑파티에도 왔었다. 쫑파티에 오기 전에도 약간 술을 마셨는지 필자에게도 다정했을 뿐만 아니라 클럽의 여러 남자들(스탭들)에게도 친근감 있게 다정하게 대했다. 넓은 의미에서는 인맥을 쌓는 연장선일 것이다. 예쁜 여배우 지망생과의 친분을 마다할 남자 스탭은 고자가 아닌 이상 없을 것이다. 디워 쫑파티에 ‘스타 유’가 입고 온 의상이 인상적이었다(위 사진의 의상은 아님). 앞에서 보면 보통 파티 드레스인데 등쪽은 완전히 천조각 하나 없는 디자인이었다. 그녀는 필자를 보자마자 허그를 했는데, 이런 인사에 익숙하지 않았던 필자가 그녀의 등에 손이 닿는 감촉을 느껴면서 살짝 당혹스러우면서 솔직히 기분은 좋았다. 예쁜 여자의 비록 등짝이지만 맨살을 만져보는 것을 싫어할 남자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매우 흥겹게 쫑파티를 즐겼다. 물론 필자와 춤춘 건 아니고 여러 스탭들과 또는 그곳의 여러 남자들과 춤을 췄다. (디워 쫑파티에 관한 글은 나중에 나온다)

 

 

(2021년 추가 내용: 그러나 안타깝게도 몇 년 전에 우연히 영화 ‘라스트 이브’ IMDB 정보를 읽어보다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스타 유’가 2010년에 죽었다고 써져 있는 것이다. 사망 원인은 적혀 있지 않았다. 필자와는 위에 적은 것처럼 아주 작은 만남뿐이었지만 안타깝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무쪼록 저 세상에서는 꿈을 이뤄서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란다.)

 


LA 시가지 촬영은 어떻게 마쳤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만큼 하루가 분주했고 후딱 지나갔다. 퇴근하려고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이무기 만한 줄이 늘어서 있었다. 엑스트라들이었다. 그날 일한 수당은 그날 줬다. 한국 노가다와 일맥상통한다. 100불 정도라고 들었다. 적은 돈은 아니지만 매일 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전업거리는 못될 것이다. 이들 중에 대스타가 나올 수도 있다. 엑스트라에게도 꿈과 희망이 넘치고 실현되기를...

 


계속...

 


2007년 9월 18일 (초안)
2021년 8월 22일 (약간 수정) 김곧글(Kim Godg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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