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왜 ‘제임스 딘(James Dean)’이냐고 묻는다면, 얼마 전에 재밌게 봤던 영화 ‘라라랜드’의 영향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영화에는 LA의 관광명소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환상적인 로맨틱 향연이 펼쳐진다. 그곳은 제임스 딘의 대표작 ‘이유 없는 반항 (Rebel Without A Cause, 1955)’의 중요한 로케이션이기도 하다. LA 그리니치 천문대가 나오는 영화는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필자의 기억 속 어딘가 뚜렷하게 각인된 영화는 ‘이유 없는 반항’이다. 그런데 곱씹어 생각해보니 ‘내가 이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봤던가?’ 라는 질문에 맞닥뜨렸고 명쾌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먼 옛날 브라운관 텔레비전으로 보다가 졸다가 보다가 졸다가... 끝부분의 총소리와 사이렌소리에 잠시 깼다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골아 떨어졌던 것 같다. 최근에 마음을 잡고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감상했다. (더불어 제임스 딘의 3대 작품 중에 나머지 ‘에덴의 동쪽’과 ‘자이언트’도 최근에 제대로 감상했다)


총평을 하자면, 약 60년 전에 만들어졌기에 어쩔 수 없는 몇몇 진부한 것들을 그러려니 흘려 넘긴다면 전반적으로 세련된 영상미와 제임스 딘의 열연에 매혹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여러 조연들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이듬해 만들어져 걸작으로 남은 제임스 딘의 유작 ‘자이언트(Giant, 1956)’에 재등장하는 조연들도 눈에 띤다. 특히, 후반부에 제임스 딘에게 복수심을 불태웠던 불량학생 3인 패거리의 단역이었던 ‘데니스 호퍼’가 영화 ‘자이언트’에서는 분량도 꽤 많이 늘고 스토리에서 주목을 받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록 허드슨 부부의 장남으로 열연하는 수직상승을 한다.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난 데니스 호퍼 배우는 필자를 비롯 90년대를 젊게 살았던 관객이라면 풋풋했던 ‘키애누 리브스’와 ‘산드라 블록’의 흥행작 ‘스피드(1994)’에서 인상적인 악역으로 기억되는 명배우였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짐(제임스 딘 분)의 각별한 친구 ‘존(별명은 플라톤)’으로 열연했던 ‘살 미네오(Sal Mineo)’ 배우는 영화 ‘자이언트’에서 아주 짧은 장면에 출연할 뿐이다.


‘이유 없는 반항’이 다루고 있는 시간적 배경은 대중영화 범주에서 살펴보자면 흔한 편은 아니다. 하루는 넘고 이틀이 채 안 된다. 첫째 날 늦은 밤부터 다음 다음 날 즉 내일 모레 새벽까지이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고등학생의 일상에 희로애락의 굵직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역동적으로 발발하고 주인공 짐(제임스 딘 분)은 정서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장하게 되고 청소년의 입장에서 기성세대에게 던지는 작지만 중요한 메시지를 남긴다. 어쩌면 반항아가 주인공인 청춘영화의 (효시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교과서 또는 골격이라고 칭할 수 있다. 이전에도 이런 소설이나 영화가 없지 않았지만 또한 걸출한 스타 제임스 딘의 영향으로 이만큼 미국관객들에게 그리고 전 세계 관객들에게 각인된 작품은 이전까지 없었다. 돌이켜보면 국내외를 통틀어 이 영화의 이야기와 주인공을 닮은 청춘영화들이 얼마나 많이 양산되었는지 헤아릴 수도 없을 것이다.


참고로, 이 영화는 1955년에 제작되었기 때문에 당시에 미국과 달리 한국을 비롯 아시아권에서는 그다지 흥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과 달리 그때는 소위 아시아 국가의 중산층이 널리 보편화되지 못 했기 때문에 이 영화의 주인공과 이야기에 공감할 관객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흥행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당시 최고의 유토피아 국가 미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 의한 것이지 순수하게 이야기와 인물에게 찰떡궁합으로 공감된다든가 카타르시스를 느껴서는 아닐 것이다. 


참고로, 같은 해에 상영되어 흥행에 성공하고 작품성도 인정받았던 ‘폭력교실(Blackboard Jungle, 1955)’도 비슷한 유형이지만, 여기서 내면의 창을 깊게 표현해주는 인물은 불량학생 아니라 새로 부임한 선생(기성세대)라는 점이 다르다. 불량학생들은 거의 평면적인 인물로 표현될 뿐이다. 이 영화는 당시의 입장에서 폭력 수위 때문에 상영금지 경력으로 유명세를 떨쳤는지는 몰라도, ‘이유 없는 반항’ 보다 다소 인지도와 지명도가 떨어지는 작품성일 텐데 그 이유 중에 하나는 기성세대가 내세우는 가치관을 지지하고 위로해주는 측면이 강하고 (이런 내용이 안 좋다는 뜻이 아니라 이런 유는 기존 작품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기에 새로운 걸작이라고 칭송할 수 없다) 불량학생의 내면을 깊게 다층적으로 다루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오래도록 영화팬들에게 기억되고 회자되는 여러 이유들 중에 중요한 하나는 젊은 시절의 ‘빅 모로(Vic Morrow)와 ‘시드니 포이티어’ 배우의 인상적인 연기를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빅 모로’ 배우는 2차세계대전을 기존에 비해서 실존적이고 휴머니즘적으로 다룬 국내에서도 꽤 인기를 끌었던 TV 시리즈 ‘전투(Combat)’의 주연으로 유명하고, ‘시드니 포이티어’는 영화 ‘To Sir With Love(1967)’로 유명한 흑인 남자 배우이다. (추가로 이 영화는 최초의 록큰롤 곡이라고 널리 알려진 'Rock Around The Clock (Bill Haley & His Comets)'이 주제곡(인트로와 엔딩 크레딧에 나옴)이 등장했기 때문에 유명하기도 하다.


1950년대는 미국이 2차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경제적으로 가파르게 상승하여 넉넉하게 먹고 사는 중산층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따라서 예술과 대중문화는 혁신적이거나 풍성해지거나 다양해졌는데 ‘이유 없는 반항’은 2차세계대전을 몸소 겪지 않은 젊은세대가 기성세대와 대치되거나 충돌하는 새로운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생산했는데 이것을 대변하고 지지해주는 대중영화였다고 볼 수 있다. 쉽게 말하면,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진 가정에 돈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젊은세대를 위로하는 영화였다. 이런 형태의 청춘영화는 한국에서는 80년대 후반부터 등장해서 90년대에 다양하게 꽃을 피웠던 것 같다. 한국은 그 즈음에 서울 또는 대도시에 경제적으로 넉넉해진 중산층들의 자녀들이 육체적 경제적 고생 없이 성장해서 형성된 가치관이 기성세대와 많이 달랐던 시기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 전까지 청춘영화는 대개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해서 다양한 사건을 겪으며 성공하거나 실패하면서 삶의 교훈을 얻는 내용이 많았지 한 가정에서 기성세대와 젊은세대 간의 가치관이 많이 달라서 발생하는 문제를 다루지는 않았다.


즉,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중상류층 가정에서 성장한 젊은세대가 고생 끝에 낙원을 일궈냈다고 자부하는 기성세대들의 입장에서 생뚱맞게 뒤통수치는 이해할 수 없는 불만을 토로하고 반항하고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문제아 주인공이 되어 활개 치는 청춘영화 장르가 미국의 경우에는 1955년에 ‘이유 없는 반항’을 필두로 다양하게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한국의 경우에는 1980년대 후반 또는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유형의 영화가 잘 만들어지지 않는데 그 이유는 당연히 흥행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 이유는 요즘 젊은세대의 가치관이 고속성장 시대 이후의 저성장 시대에 사회로 떠밀려져서 괜찮은 어딘가에 비집고 들어가 나홀로 먹고살기조차 버겁고 고달프다는 것을 일찍부터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가정과 사회에 불만과 반항을 표출하며 정서적 만족을 꽤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경제적으로 불안하지 않고 물질적 만족을 향유하며 살다가 늙어죽을 수 있을까를 지상최대고민으로 설정하고 살아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또한 젊은세대들이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기 위해서 향유할 수 있는 것들이 과거시대에 비해 엄청나게 다양해지고 많아졌다는 것도 이유에 포함될 것이다.


주인공 ‘짐 스타크(제임스 딘 분)’이 일탈하는 고교생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패거리와 어울리며 선량한 학생을 괴롭히거나 다른 패거리와 패싸움을 일삼는 전적으로 불량한 학생은 아니다. 그날 밤 짐이 경찰서에 끌려간 것은 단지 만취 상태로 길거리에 엎드려 잠들어 있는 것을 순찰 중이던 경관이 발견해서 데려온 것이다. 짐이 바라는 것은 부모가 서로를 존중해주고 가정에서 각자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배려와 사랑이 화기애애하게 넘치는 가정에서 사는 것이다. 특히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늠름하고 믿음직하고 존경할만한 아버지를 기대한다. 그러나 현재는 동물원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사 줄 건 다 사주고 해달라는 것은 다 해줬는데 도대체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다며 답답함을 토로하는 부모와 할머니는 짐의 일탈을 이해할 수 없다며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말다툼하기 일쑤다. 기성세대인 부모의 입장에서 그야말로 이유 없는 반항인 셈이다. 부모 생각에는 그저 철없는 아들이 물질적으로 풍족한 환경에서 오냐오냐 자랐고 세상물정을 잘 몰라서 그러려니 치부할 뿐 깊게 이해해보려고 하지는 않는다.


대개 주인공은 주요 배경이 되는 장소로 이동해오면서 이야기가 바야흐로 시작되는 경우가 흔한데 이 영화도 그런 상습을 따른다. 짐은 새로 전학을 와서 마음이 끌리는 여학생을 만나는데 하필 불량학생들과 어울리는 여학생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주디이다. 주디의 불만은 짐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어린 아들에게만 극진히 사랑을 표현하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이 불만이다. 주디는 그 불만을 불량학생들과 어울리며 해소하고 있다.


주디가 불량학생 패거리의 우두머리 버즈의 여자친구이므로 실제로 둘이 어디까지 진행된 사이인지와는 무관하게 버즈와 짐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숙명이다. 잭나이프를 사용하여 다소 살벌하게 싸움을 하고나서 죽을 수도 있다는 ‘치킨런(국내 번역 ‘겁쟁이 게임’ 또는 ‘죽음의 질주 게임’)‘으로 재대결을 제시하며 자신의 구겨진 체면을 만회하려는 버즈는 막상 대결에 임박해서는 단 둘이 있을 때 악감정은 없고 이후부터 잘 지내자고 말할 정도로 짐을 마음에 들어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다와 접한 미들턴 절벽으로 떨어지는 승용차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버즈는 즉사하고 만다. 짐은 실수하지 않고 살았지만 이 일로 인하여 버즈의 복수를 하려는 불량학생 패거리 3인에게 쫓기는 처지가 된다.


이에 앞서 짐이 사귄 친구는 주디 말고 남자 한 명이 더 있다. 자신의 별명이 플라톤이라고 소개한 존이란 동급생이다. 전날 밤 경찰서에서 처음 보는 짐의 친절한 배려에 마음의 문을 연 존은 새 학교에 첫 등교하는 짐과 재회하게 되고 그에게 친절한 안내자가 되어 준다. 누가 불량학생 패거리이며 조심하라고 알려준 것도 존이다. 존은 부모의 이혼으로 마음의 상처를 깊게 입었고 아물게 되기까지는 세월이 더 필요한 상태이다. 어머니와 함께 사는 저택은 풍족한 환경이지만, 어머니는 새 남자친구와 여행을 떠나는 등 집안일과 아들 존에는 무관심하다. 육중한 흑인 보모가 존을 키운 거나 다름없다. 보모는 그의 부모이자 친구이자 집사이다. 이혼 후 연락이 끊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존의 마음을 항상 불안하게 만든다.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상처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마음을 짓누른다. 그런 영향으로 학교 친구 하나 없이 외톨이로 지내던 존에게 전학생 짐의 등장은 구세주 같은 친구가 아닐 수 없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짐이 전학 온 바로 그날 전교생이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견학수업을 받는다. 따분함을 달래줄 껀수를 찾던 불량학생 패거리는 눈에 띄게 행동한 짐을 먹이감으로 삼는다. 패거리의 우두머리 버즈는 강제로 짐에게 잭나이프를 던져주고 싸움을 건다. 짐은 처음에 완강히 거부하지만 겁쟁이라는 말에 피가 끓어올라 부득이하게 반격하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버즈를 제압하기까지 한다. 버즈는 재결투를 그날 밤 ‘치킨런’으로 제안하고 뭔지 몰랐던 짐은 마지못해 수락했고 참사가 터진 것이다.


짐은 주디를 마중해주고 집으로 돌아온다. 부모에게 뉴스에서 떠드는 자동차 사고와 버즈의 죽음과 자신이 깊게 관련되어 있어서 자수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부모는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만류한다.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라지만 짐은 이해하지 못 한다. 위선으로 가득한 기성세대에 환멸을 느낀다. 짐은 스스로 경찰서로 찾아가지만 전날 밤 친밀하게 인맥을 쌓았던 레이 프레딕 경관은 외근 중이라 만나지 못 하고 그냥 귀가한다. 이때 경찰서 앞에서 불량학생 패거리 3인과 지나치고 그들은 짐을 향한 복수심을 불태우고 즉시 실행에 옮긴다.


패거리는 짐의 집주소를 알아내려고 플라톤 존을 협박한다. 존은 어머니 방에 있던 권총을 들고 짐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 몸조심하라고 알려준다.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멀지 않은 빈 저택에서 짐은 주디와 아름다운 밤을 보내고 있었고 존도 합류해서 재밌게 소꿉장난을 하고 있었는데 불량학생 패거리 3인이 들이닥치고 존은 얼떨결에 총을 발사해서 패거리에게 상해를 입히고 그 주변을 순찰 중이던 경찰이 총소리를 듣고 체포하려고 압박해온다. 이런 상황에 겁에 질린 존은 짐의 세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둔다. 짐은 불쌍한 존의 죽음에 오열하며 슬픔의 몸부림을 친다. 밤은 새벽으로 향하고 경찰차와 앰뷸런스는 떠나고 짐은 새로 찾은 연인 주디를 끌어안고 집으로 향한다. 짐의 부모는 성숙해진 듯한 아들의 모습을 보고 다소 흡족해 한다.


이 영화는 청춘영화 장르이지만 짧은 시간 동안 두 명의 학생이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다고 엽기적이거나 반인륜적이거나 청소년 범죄를 다룬 장르물은 아니다. 두 학생의 죽음에 주인공 짐은 직접적인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니다. 그러나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짐은 충격적인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특별한 무언가를 느꼈을 것이고 어떤 자아 성찰을 이루게 되었을 것이다. 영화에서 그것을 자세히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관객 각자가 알아서 찾아먹어야 할 부분이다. 한편, 짐에게 불행만이 연이어 들이닥친 것은 아니다.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해주고 이해해주고 아껴줄 연인 주디를 만나게 되었고 졸업 후 행복한 가정을 꾸려갈 희망적인 꿈을 꾸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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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헌책방에서 ‘이유 없는 반항’ 국내소설책(1993)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원래 원작소설이 있었나? 감독 ‘니콜라스 레이’가 스토리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소설책으로 출판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제목만 같고 다른 내용의 소설이 있기는 하지만 1955년에 니콜라스 레이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의 소설책이 미국에서 출판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국내에서 1993년에 한 번 출판되었다.


1990년대는 잘 알다시피 비디오테이프의 전성기였고 수많은 영화들이 비디오로 제작되어서 판매되었다. 그전까지 영화를 극장에 가야만 (또는 텔레비전에서 방송을 쫘줘야만) 볼 수 있는 매커니즘이 바뀐 것이다. 게다가 본인이 원한다면 수없이 여러 번 반복해서 감상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즈음에 국내 서점가에 등장한 것이 영화소설(영화를 소설화함)이 아닐까 추측된다. 원작소설이 없는 외화 중에서 흥행했던 작품을 비디오테이프로 여러 번 반복해서 감상하면서 소설책으로 옮겨 써서 출판한 것이다. 저작권법이 지금처럼 엄격하지 않았을 때이므로 언더그라운드 출판사에서 출판한 것 같다. 혹시 1993년에 국내 출판된 ‘이유 없는 반항’ 소설책도 그런 책이 아닐까 추측된다. 실제로 읽어보면 일반적인 소설 같지 않고 영화의 영상에 작가의 상상력을 가미해서 써내려간 티가 많이 난다. 특히 이 부분에서 빼도 박도 못 하는 결정적 증거를 남기고 말았다. 아래는 영화에는 없는 장면이지만 주디가 화려하게 화장을 하고 친구들과 어울릴 파티를 기다리다가 아버지한테 혼나기 전의 외모 묘사이다.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거울 앞에 선 주디는 저절로 감탄의 소리를 터뜨렸다. 완전히 다른 여자가 거기에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보다 더 예쁘고 브룩 쉴즈도 감히 못 따를 매력적인 모습이라고 자부했다.


브룩 쉴즈가 언급된 점은 이 소설책이 적어도 브룩 쉴즈가 국내에서 책받침 여신이었던 시기 이후에 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원작소설에는 없지만 국내 번역 작가가 당시의 재미를 위해서 추가한 거라고 추측할 수도 있지만 가능성은 낮다. 이것 외에도 한두 개가 더 있는데 생략하겠다. (사실 까먹었다)


참고로 책표지의 사진은 제임스 딘의 유작 ‘자이언트’의 모습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볼 수 있다. 출판사의 단순한 실수인지 다른 의도가 있었는지 또는 제임스 딘의 영화를 안 본 것 같다.


제목 ‘이유 없는 반항’에서 ‘이유 없는’의 뜻은 어떤 이유가 부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기성세대 입장에서 젊은세대에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뜻이다.


2017년 6월 22일 김곧글(Kim Godg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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